'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흔적을 찾아서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제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얗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찌는 가을입니다. 어릴적부터 가을은 책읽기 좋은 계절이라 들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아침 일찍 길에 올랐습니다. 강원도 평창을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길이 멀어 스키장으로 유명한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하루를 묵고 평창군 이효석 문학관으로 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중부 고속도로를 달리다 양양고속도로 빠져 영동 고속도로에 오르니 얼추 3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중간에 휴게소에 통감자로 배를 채웠습니다. 일찍 출발한 터라 길은 막히지 않았고 호텔에서 일찍 짐을 풀 수 있었습니다. 주변의 깔끔한 식당에서 강원도 고등어 자반이 나오는 한식에다 '봉평 메밀막걸리'를 쭉 들이켰습니다.
호텔 주변에는 벌써 단풍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스키장 곳곳의 나무들이 제법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오전, 평창군 이효석 문학관으로 가는길 주변 나무들도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가슴이 설레이었습니다. 이효석은 아마도 감수성이 풍부한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은 작가였습니다. 달이 휘영청 뜬 밤에 메밀밭 옆길을 걸어가는 장똘뱅이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를 많이도 상상했습니다.
여름이면 달밝은 밤이면 남천에 멱을 감으려고 간 기억과 자주 겹치곤 했습니다.
호텔에서 평창군 봉평면 효석문학길 54에 있는 '효석달빛언덕'까지는 40분 남짓 걸렸습니다. 동네 초입에는 메밀국수를 알리는 간판이 곳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효석문학길이 알려주듯 이효석이라는 작가 한 사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미국 몬터레이가 '분노의 포도'를 쓴 존 스타인벡으로 먹고 사는 것처럼 말이죠. 수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이어 9월에 열린 '2024 평창효석문화제'가 계속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효석달빛언덕과 이효석문학관 통합 관람권을 4500원에 사서 먼저 '효석달빛언덕'으로 들어갔습니다. 문학 테마 관광지인 이 곳에는 이효석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복원한 생가와 그가 작가 활동을 한 근대의 시간과 공간, 과후배 조용만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지향한 '구인회' 활동과 근대문학을 경험할 수 있는 4개의 체험공간으로 이뤄진 근대문학체험관, 이효석이 평양에서 간 집을 재현한 '푸른집', 창밖의 달을 구현한 '연인의 달', 달빛나귀전망대 등이 있는 곳입니다.
효석 생가는 100여년 집치고는 꽤 컸습니다.가로로 네 칸, 세로로 두 칸의 집이었습니다. 소를 키우는 외양간도 있었습니다.
근대문학관 뒤에 있는 푸른집은 이효석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 집이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 경성제국대 영문과를 졸업한 이효석의 서구취향을 직관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쓴 것으로 보이는 타자기, 늘 들었을 축음기와 오르간, 커피, 침대가 있는 침실, 세면대와 거울이 있는 목욕탕, 그가 읽었을 두툼한 양장본 책 등등이 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1930년대 조선민족의 삶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음을 추정할 있었습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은 그의 작품과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놓고 있습니다.2002년 9월 7일 제4회 효석문화제 기간 중 문을 연 이효석 문학관은 그의 작품 일대기와 육필 원고, 유품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해놓고 있었습니다.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도 다수 있었습니다. 메밀 생산지와 생산량 등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봉평하면 메밀이 떠오르지만 전국에서 메밀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산지는 아니어서 의외였습니다.
이효석은 1907년에 태어나 1942년에 35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요즘도 외진 그곳에서 태어난 그는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 (현 평창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무시험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는 경기고보를 거쳐 현재 서울대 영문과인 경성제국대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요즘이면 동네에 플레이카드가 내걸렸을 법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그는 매일 뜰의 낙엽을 긁어 태우면서 상념에 잠기며 삶의 의미, 의욕과 보람들을 느끼곤 했다고 합니다.
이효석은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동반자작가로 데뷔했습니다. 노령근해 등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행진곡', '기우'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 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에 참여해 '돈'과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가난뱅이' 작가였다고 합니다.
1930년대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그는 1934년 평양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과 교수가 된후 '산','돌' 등을 발표했고 1936년에는 '메밀꽃 필 무렵'을 내놓았습니다. 이 해는 베를린 올림픽이 개최된 해였고 저의 부친에 태어난 해라 잊지 않는 해입니다.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한 뒤에는 이를 승계한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수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푸른집'에 생활했습니다. 넓은 정원 속에 숨어있는 붉은 벽돌집으로 목욕탕과 지하실, 침대가 놓인 침실 등이 있는 산장과 같은 집이었습니다. 서재에는 꽃이 항상 놓여있었고 거실에는 축음기와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그는 축음기로 항상 음악을 들었으며 쇼팽과 모차르트의 피아노곡을 연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효석은 커피를 지극히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거의 인이 박힌 듯하다'고 말할 만큼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특히 '진한 다갈색의 향기 높은 모카'를 좋아했고 퍼콜레이터로 커피를 끓이며 행복에 잠기곤 했다고 합니다.
이효석은 1940년 부인과 차녀를 잃은 후 깊은 실의에 빠져 건강을 해쳤고 1942년 5월25일 결핵수막염에 걸려 숨을 거뒀습니다.
그는 짧은 생애에도 11여 편의 수필, 수많은 단편과 희곡, 번역을 남긴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한 한국의 독자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준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메밀꽃 필 무렵'일 것입니다.
이 소설은 장돌뱅이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허생원, 허생원과 함께 떠돌아다니는 조선달, 동이입니다. 허생원은 하얀달이 뜰 때면 성서방네 처녀와 인연을 맺은 날을 추억합니다.그는 얼굴이 얽은 얼금뱅이에다 왼손잡이입니다. 길에서 만난 동이 역시 왼손잡이인데 소설은 동이가 허생원의 아들일 것임을 암시합니다.
달빛언덕에서 이효석 문학관을 둘러보는데 두 시간 남짓 걸렸지만 시간흐르는 줄을 몰랐습니다. 1930년대 식민지를 살아야하는 지성인 이효석이 겪었을 갈등을 상상하기에 바빴습니다. 일제 부역논란이 있었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나라에도 이효석처럼 간결하면서도 깔끔하고 매끄러운 글을 잘 쓴 대문장가가 있었다고 하니 기쁨 또한 넘쳐나면서 운전하면서 쌓인 피로가 날아갔습니다.
아마도 간결한 문장을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년),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1929년)를 읽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대문호로 극찬한 나쓰메 소세키가 1914년 내놓은 '마음'을 읽었을 것으로 추정도 해보았습니다.
그는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영향을 받은 존 밀링턴 싱의 희곡을 분석한 학부 졸업논을 썼습니다. 그런 점을 보면 그의 작품에는 서구 문학이 영향을 줬을 것으로 추정해봤습니다.
문학관을 나와 걸어서 10분 거리의 식당에서 메밀국수와 감자 옹심이로 요기를 했습니다. 돌아갈 시간이 빠듯해 허생원이 돌아다녔을 5일장 봉평장을 둘러보는 것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표고버섯 한 봉지와 봉평산 호박 한 개를 사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둥근 달이 뜬 날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과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이효석이 눈앞에 선하고 봉평막걸리 향과 맛이 여전히 남아 있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훤한 달빛 아래 활짝 핀 메밀꽃 사진을 찍으리라 생각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박준환 기자 naulb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