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째 이어지는 캐나다 원주민의 철도 봉쇄...트뤼도 총리 지도력 시험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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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째 이어지는 캐나다 원주민의 철도 봉쇄...트뤼도 총리 지도력 시험대에
  • 박고몽 기자
  • 승인 2020.03.04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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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국가 경제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면 태평양 건너편의 캐나다는 지난달 6일(현지시각)부터 이어지는 캐나다 원주민(First Nations)들의 철도 봉쇄 때문에 경제 마비를 넘어 쥐스땡 트뤼도 연방총리의 지도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등 연방 시스템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캐나다 생랑베르의 철도를 점거봉쇄한 원주민들 가운데 한 사람이 2월20일 '주권침해는 안 된다'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사진=내셔널포스트
캐나다 생랑베르의 철도를 점거봉쇄한 원주민들 가운데 한 사람이 2월20일 '주권침해는 안 된다'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사진=내셔널포스트

3일(이하 현지시각) 퀘벡주 몬트리올의 일간지 주르날 드 몽레알(Le Journal de Montréal) 등 캐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밴쿠버 북부의 캐나다 원주민 웻수웨텐(Wet'suwet'en) 족이 지난 2월 6일 부족 영토를 지나는 캐나다 국유철도를 점거한 이후 한 달째 철도통행을 봉쇄하고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도슨 크리크(Dawson Creek)를 출발해 로키 산맥을 지나 키티마트(Kitimat)에 이르는 670km의 천연가스 공급관이 부족 영토를 통과하는 문제와 관련해 공사주체인 티씨에너지(TC Energy)사와 웻수웨텐 부족 내 선출직(選出職) 추장들이 맺은 협정을 부족의 세습직(世襲職) 추장들이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천연가스 공급관에 반대하는 환경보호론자와 학생들이 철도봉쇄에 가세했는데,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고 일부 주동자를 체포하자 캐나다 전역의 원주민이 들고 일어나 철로를 점거했다.

이에 주르날 드 몽레알은 한 달 동안 계속된 원주민의 철도 봉쇄 때문에 트뤼도 정부에 대한 캐나다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는 설문 결과를 이날 보도했다. 

여론 조사업체 입소스(Ipsos)가 벌인 이번 설문조사 결과, 캐나다 연방 자유당 정부에 대해 만족한다는 응답자는 40%에 불과해 지난 주보다 3%나 감소했다. 

궁지에 몰린 쥐스땡 트뤼도 캐나다 총리. 사진=내셔널포스트
궁지에 몰린 쥐스땡 트뤼도 캐나다 총리. 사진=내셔널포스트

원주민에 의한 철도 봉쇄 사태가 벌어진 이후, 쥐스땡 트뤼도 총리와 관계 부처 장관들에게는 비판과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철도 봉쇄를 풀고 대화로 해결하자는 총리의 요청이 있었으나 웻수웨텐 세습 추장들을 지지하는 캐나다 전역 원주민의 철도 봉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캐나다 국민의 인내심도 점점 바닥을 보이는 모양새다. 이번 입소스 설문 결과, 경찰이 나서서 철도 봉쇄와 시위를 끝장내야 한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63%에 도달했다.

 특히 전체 주민 중 원주민 비율이 가장 높고, 따라서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 행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서스캐처원(Saskatchewan) 주와 매니토바(Manitoba) 주는 응답자의 75%가 경찰의 개입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퀘벡 주에서는 경찰 개입에 찬성한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57%에 그쳤다.

캐나다 국영철도 여객부(VIA rail)의 캐나다 횡단 철도 노선
캐나다 국영철도 여객부(VIA rail)의 캐나다 횡단 철도 노선

지난 1990년, 모호크 원주민과 경찰의 대치 끝에 캐나다 군대까지 출동한 오카 사태(Oka Crisis)의 쓴 기억이 남은 탓으로 해석된다. 

몬트리올 근교의 모호크(Mahawk)족도 웻수웨텐 족을 지지하며 몬트리올과 생-로랑 강(Fleuve Saint-Laurent) 이남 지역을 잇는 다리를 부분 봉쇄했는데, 모호크족 보호구역인 카나와케(Kahnawake)에서 퀘벡 주경찰이 AK-47 돌격소총과 기관총 등 중화기를 압수 수색함에 따라  제2의 오카 사태가 빚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실 웻수웨텐 족의 철도 봉쇄는 캐나다 원주민과 맺은 협정을 손바닥 뒤집듯 해온 '백인정부'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할 수 있다. 

캐나다 정부는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e)이란 명목으로 가장 황폐한 땅을 캐나다 원주민에게 할당했고, 보호구역에 머문다는 조건으로 세금을 면제하고 생계비를 보조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보호구역으로 들어간 원주민은 노동의욕을 잃고 정부의 보조금에 오로지 의존하게 되었는데, 외부에서 공급되는 식료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원주민들은 소득의 절반 이상을 식비에 지출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실업률, 각종 약물중독, 성폭력, 자살률, 질병 발생 등이 가장 높은 지역이 예외 없이 원주민 공동체란 것만 봐도 캐나다 원주민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짐작할 수 있다.  

백인정부는 원주민에게 자치권을 준다는 미명하에 대대로 이어진 세습 추장 대신 소위 민주적으로 뽑는 '선출직 추장' 제도를 만들었다. 선출직 추장 대다수가 백인에 우호적인 인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쉽게 얘기해서 지난 세기처럼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다스릴 수 없자 원주민끼리 분열하고 대립하게 한 것이다.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이번 웻수웨텐 부족 사태도 백인들의 이이제이 정책의 부산물이다. 

비교적 젊고 백인에 우호적인 선출직 추장들은 외부와의 합의나 계약을 할 경우 이를 공동체의 원로들로 이뤄진 '세습 추장단'에 제출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는 절차를 거쳤다.  캐나다 하원이 법안을 통과시키면 상원이 비준 동의하는 형식과 같다.

원주민 봉쇄로 운행이 중단된 캐나다 국유철도 CN 소속 기관차. 사진=CN
원주민 봉쇄로 운행이 중단된 캐나다 국유철도 CN 소속 기관차. 사진=CN

그러나 티씨에너지(TC Energy)사는 천연가스 공급관이 웻수웨텐 영토를 우회하는 데 드는 비용을 아끼려고 '반대할 것이 뻔한' 세습직 추장단의 동의를 생략하고 선출직 추장들과의 합의만으로 적법성을 확보했다며 공사를 강행하려 든 것이다. 

그간의 사정이 이런데도 '경찰이 나서서 원주민들을 체포하고 철도 봉쇄를 풀라'는 캐나다인이 63 ~ 75%에 이른다고 하니 과연 캐나다가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인권의 챔피언'인지,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이 조화를 이루고 사는 '다문화주의, 모자이크 문화주의' 국가인지 심히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몬트리올(캐나다)=박고몽 기자 clement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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